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티오키아 공국 (문단 편집) == [[르노 드 샤티용]]의 치세 == 레몽은 보에몽 2세의 딸 콩스탕스와 결혼하여 아들인 보에몽 3세와 딸 마리아를 낳았다. 슬프게도 보에몽 3세는 안티오키아를 지배하기엔 너무 어렸고, 주변국은 콩스탕스의 새 남편감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첫 번째 신랑감은, 안티오키아 공국의 상위군주인 동로마 제국의 마누일 1세가 추천한 존 로저 - 또는 요안니스 로자리오스라는 그리스식 이름으로 알려진 - 라는 노르만계 동로마인이었다. 하지만 공국의 독립성이 더이상 훼손되기를 원치 않았던 안티오키아의 프랑크 귀족들을 필두로 그를 반대하였다. 안티오키아 공국을 보호하기 위해 3차례나 방어 원정을 감행했던 [[보두앵 3세]]도 여러 명의 귀족들을 그녀에게 소개시켜주었지만, 그녀는 모두 거부하였다. 사실 그녀는 이미 [[2차 십자군]]의 패잔병이자 남프랑스의 한미한 기사인 [[르노 드 샤티용]]과 밀월관계에 있었다. 그들은 1151년경에 몰래 약혼했고, 1153년경에는 르노가 비공식적인 안티오키아 공작으로써 외교 전면에 등장했고 1153년, [[보두앵 3세]]는 르노에게 안티오키아의 공작위를 정식으로 허가했다. 하지만 [[라틴 총대주교]] 에메리는 이 대관식에 반대했다. 그가 보기에 이 사태는 안티오키아의 고귀한 공주가 르노의 외모만 보고 사랑에 빠져 공국을 통째로 용병 나부랭이에게 공국을 넘겨주는 꼴이었다. 거기에 더해 그들의 결혼 관계는 교회법에 적합하지도 않았으며, 상위 군주인 [[동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전혀 인정받지도 못한 대관이었다. [[라틴 총대주교]]가 그를 인정하지 않자, 르노는 라틴 총대주교좌를 기습하여 에메리를 붙잡았다. 그는 매질당한 채로 안티오키아 대성당의 첨탑에 꿀이 발린 채로 묶여져 고통받았고, [[보두앵 3세]]가 개입하여 에메리를 풀어줄 것을 지시하기 전까자 고문은 계속되었다. 결국 라틴 총대주교는 르노의 대관과 결혼을 인정했지만, 그를 축복하기를 거부하고 [[예루살렘 총대주교]]에게로 도망쳤다. ||[[파일:1123e15e06ba68829360ff39cf4ebd7d--byzantine-empire.jpg]]|| || 승리자로써 입성하는 동로마 황제 마누일과, 그 말을 끄는 르노 || 상위 군주인 [[마누일 1세]] 는 같은 해 르노에게 동로마 제국의 봉신으로써 인정하는 대신 [[아르메니아]]의 토로스 2세가 벌인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토로스 2세는 몇년 전 마누일이 보낸 대규모 동로마군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아직 그의 영토는 타르수스 산맥에 숨어 있는 몇몇 요새에 지나지 않았다.[* 동로마와 아르메니아인들은 그런 그를 두고 산 속의 왕이라고 조롱했다.] 마누일은 그들을 진압하고 싶었지만, [[헝가리]]에서 일어난 후계문제에 관여하기 위해서 중앙군을 킬리키아로 뺼 수 없었던 그는 르노를 인정하는 악수를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르노는 동로마의 금전지원을 받아 킬리키아와 [[시리아]]를 향하는 국경 지대의 요새지대들을 점령하고 공국의 영토로 삼았다. 아직 빈약한 병력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는 1154년경 [[베네치아]] 상인들과 조약을 맺어 군자금을 얻었고, 나중에 그의 유일한 우방이 되어줄 저명한 [[성전 기사단]] 병력 수천을 안티오키아에 초청해 병력을 증강했다. 그 자신도 성전 기사단에 가입할 만큼 그는 기사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성전 기사단은 그를 위해 킬리키아-시리아를 잇는 관문 요새들을 점령해 주었다. 토로스 2세는 안티오키아에게 피해를 입자, 몰래 뇌물과 사탕발림으로 르노를 꼬드겼고, 르노는 [[마누일 1세]]가 지원한 금액이 충분치 않다는 이유로 1156년부터 동로마에서의 독립을 선언하고 킬리키아의 동로마 촌락을 기습했고, 급기야 그는 공국 내의 반대를 묵살하고 부유한 동로마 속주였던 [[키프로스]]를 공격했다. 공국의 가용 가능한 전함을 모두 끌어모은 그는 키프로스에 상륙했고 공국의 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동로마 제국 수비대는 그대로 키프로스 속주의 주도인 [[니코시아]]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프랑크인 기사들은 그리스계 여자들을 강간하고 약탈했으며, 처녀들과 대귀족들은 몸값을 받기 위해 공국으로 끌고 갔다. 그 중에는 무려 [[콤니노스 왕조]]의 황족이자 키프로스의 총독인 황제의 조카 요안니스 콤니노스 두카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1158년, 서방의 문제가 대강 정리되자 마누일 황제는 복속된 세르비아인, [[튀르크멘]]을 포함한 5만 대군을 끌고 안티오키아로 향했다. 르노의 우방이였던 아르메니아의 토로스 2세는 며칠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다시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동로마의 [[드로몬]]들이 안티오키아로 향하는 상선들과 상인들을 약탈했고, 육군은 안티오키아 근교의 다섯 요새와 촌락을 불태워 빼앗은 재물을 분배하였다. 르노는 [[예루살렘 왕국]]을 위시한 십자군 국가들에게 동로마 제국에 대항한 공동행동을 벌이자고 주장했지만, 이미 그의 상위군주인 [[보두앵 3세]]는 마누일 1세의 조카딸 테오도라 콤니니와 결혼하고 오히려 [[동로마]]와 동맹하고 나선 상태였다. 결국 르노는 이전의 안티오키아 공작들과 마찬가지로 거친 베옷을 입고 마미스트라에서 마누일 황제에게 항복해야만 했다. 황제는 승리자의 복장으로 안티오키아에 입성했고, 노르만 귀족들과 르노는 맨발로 마누일의 백마를 끄는 마부 역할을 맞는 치욕을 겪었다. 다시금 [[정교회]] 총대주교의 [[성찬예배]]가 안티오키아 대성당에서 집전되기로 합의되고, 동로마의 징세관들이 안티오키아를 드나들었다. 르노는 주변 이슬람 상인들을 약탈하는 것으로 소일하다가 1160년에 유프라테스 계곡 근처를 약탈하고 돌아가던 와중에 [[알레포]]의 에미르에게 공격을 당하고 포로가 되었다. 그는 그 후 무려 16년간 이슬람의 포로로 있게 되기 때문에, 더 이상 안티오키아를 통치할 수 없었다. 이 이후의 르노의 이야기는 [[르노 드 샤티용]] 문서를 참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